조선의 마지막 천재화가, 장승업의 삶을 그리다 – 영화 〈취화선〉 리뷰

영화 〈취화선〉은 조선 말기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그의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적 고뇌를 치열하게 담아냈습니다. 천재성과 방랑, 권력과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며 그려낸 예술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한 예술가의 삶이 아닌 한 시대의 영혼을 만나게 됩니다.



1. 예술로 살아간 방랑화가, 장승업의 시대

〈취화선〉은 19세기 말 혼란한 조선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사회는 구한말로, 왕권은 약해지고 외세가 밀려들며 정치와 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던 때였습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여,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제도화된 길을 거부한 화가 장승업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는 도화서 출신이 아니며, 신분도 미천했기에 제도권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림만으로 모든 장벽을 넘어섭니다. 술과 여자를 벗 삼고, 자유를 갈망하며 그렸던 그의 그림은 단지 미술 작품이 아닌 저항이자 시대의 기록이 됩니다. 영화는 그가 발 딛고 선 시대의 흐름을 배경으로, 예술가가 겪는 내부 갈등을 섬세하게 직조합니다.

2. 인물 중심의 서사 – 장승업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

〈취화선〉의 중심에는 오원 장승업(최민식 분)이 있습니다. 그는 유숙, 겸재, 단원에 비견될 만큼의 천재성을 지닌 화가로 묘사되며, 영화는 그의 내면을 폭발적인 감정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장승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술적 후견인 역할을 하는 김병문(안성기 분), 장승업을 끌어올리는 유숙 선생과 그를 시험하는 수많은 벽들, 그리고 연인과 술동무, 시기와 찬탄을 오가는 수많은 인물들은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닌 ‘예술가 장승업’을 형성하는 실타래 같은 존재로 기능합니다. 특히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술적 질투, 고집, 존경이 얽힌 관계는 극적인 감정선을 이끌어내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3. 장면마다 살아 숨 쉬는 붓결 – 영상미와 회화적 연출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의 생애를 단순히 전기영화처럼 풀지 않습니다. 그는 화가의 시선을 따라 영화 전체를 회화처럼 구성합니다. 붓으로 그은 일획처럼 화면은 한 폭의 그림 같고, 구도와 색감은 전통 회화의 미감을 그대로 옮겨옵니다. 매화와 송학, 병풍에 담긴 풍경, 절제된 색조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는 관객이 ‘그림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줍니다. 특히 장승업이 벽에 매작도를 그릴 때, 혹은 붓을 휘두르며 광기와 예술 사이를 넘나드는 장면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화가의 심상’을 시각화한 연출로 평가받습니다. 예술적 긴장감과 감정의 파동이 극을 이끄는 이 장면들만으로도 〈취화선〉은 시네마와 미술의 교차점에서 의미 있는 실험이 됩니다.

4. 국내외 반응 – 전통과 예술의 경계를 넘은 수작

〈취화선〉은 2002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임권택 감독)을 수상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는 한국 영화 최초의 쾌거였고, 한국 전통 예술의 깊이와 철학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루하지만 깊이 있는 영화’, ‘한 예술가의 불꽃 같은 삶을 진중하게 그린 수작’이라는 평이 많았으며,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평가도 갈렸습니다. 해외에서는 ‘동양 회화의 미학이 살아 있는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고, 특히 붓과 색, 인물과 공간의 감정적 연결을 시네마의 언어로 표현한 점이 호평을 이끌었습니다. 영화는 단지 장승업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예술 전체에 대한 예찬이자 성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5. 장승업이 남긴 질문 – 예술이란 무엇인가

〈취화선〉의 마지막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는 붓을 들 힘조차 없을 만큼 지쳐 있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질문만은 놓지 않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영화는 이 질문을 관객에게 전가합니다. 예술은 권력에 봉사해야 하는가, 자유로워야 하는가?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가? 그의 생은 방랑과 혼돈의 연속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붓을 들던 그의 손은 한 예술가의 치열한 삶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취화선〉은 단순한 전기 영화가 아닌, 예술을 둘러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남습니다.

마무리하며
〈취화선〉은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입니다. 장승업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삶’이 아닌, ‘삶을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붓 한 자락에 담긴 고독과 자유, 집념과 광기가 교차하는 그의 여정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강렬한 울림을 전해줍니다.